
음악은 과연 시대의 양심이 될 수 있을까. 올해 90세를 맞은 이스라엘 출신의 거장 지휘자 엘리아후 인발(사진)이 인간 존재와 역사적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무대에 오른다.
KBS교향악단은 오는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제823회 정기연주회 ‘러시아의 혼’을 개최한다. 이날 연주회에서는 20세기 러시아 음악이 품은 죽음과 인간 존엄의 문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는 두 작품,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죽음의 섬 Op.29’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3번 ‘바비 야르’가 연주된다. 2차 세계대전의 시대를 실제로 겪은 인발의 지휘는 작품이 지닌 역사적 무게를 더욱 깊게 만든다.
공연의 문을 여는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의 섬’은 스위스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동명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5/8박의 불규칙한 리듬은 섬으로 향하는 배의 흔들리는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며, 음악은 점차 어둠 속으로 가라앉듯 삶과 죽음의 경계, 인간 내면의 고독과 신비를 담담히 드러낸다.
이어 연주되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3번 b♭단조 Op.113 ‘바비 야르’는 보다 직접적으로 시대의 비극을 호출한다. 작품의 부제인 ‘바비 야르’는 1941년 나치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한 우크라이나 키이우 인근 협곡의 이름이다. 베이스 독창과 남성 합창,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결합된 이 작품은 추모이자 고발이며, 인간 본성과 존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음악으로 던진다.
이 교향곡은 러시아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의 동명 시를 바탕으로 반유대주의와 폭력의 역사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1941년 당시 나치 독일군은 키이우 시내 폭탄 공격의 배후로 유대인을 지목해 약 3만3000명을 바비 야르 협곡에서 학살했다. 이후 학살을 은폐하려 했으나,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이 사건은 홀로코스트의 상징으로 남게 됐다.
1936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인발은 유년 시절 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한 뒤, 같은 유대인이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추천으로 파리 국립 고등 음악원에서 수학하며 지휘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화려한 제스처보다는 악보에 충실한 해석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특히 말러·브루크너와 함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해석에서 독보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이번 공연에서 쇼스타코비치 ‘바비 야르’의 베이스 독창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그레 고리 슈카루파가 맡는다. 합창은 성남시립합창단과 용인시립합창단 단원들로 구성된 남성연합합창단이 참여해 작품의 비극성과 장중함을 더할 예정이다.
90세의 노(老)지휘자가 다시 꺼내든 ‘바비 야르’. 그 음악은 과거의 비극을 넘어, 오늘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관객 앞에 조용히, 그러나 무겁게 던진다.